바닷길 1400리 헤쳐 중국에 첫 발 내딛다
중국의 관문 웨이하이
천축 하늘 멀고멀어 만첩 산이로구나 애달플 손 순례자들 힘써 오르네 저 달은 몇 번이나 외로운 배 보냈던고 구름 따라 돌아온 이 못 보았네.
天竺天遙萬疊山 可憐遊士力登攀 幾回月送孤帆去 未見雲隨一杖還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中)
인천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낮 12시가 조금 넘어서다.
오른손에 든 여행용 가방과 왼쪽 어깨에 둘러맨 카메라 가방이 그리 가볍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어쩌면 결혼 6년 만에 어렵게 얻은 아이, 채 7개월도 되지 않은 어린 딸이 눈에 밟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터미널에 들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중국말로 된 각종 광고문과 안내판이다. 이곳 제2부두가 중국 전용노선인 만큼 한국을 찾는 중국인들을 겨냥한 듯하다. 그럼에도 한국 속에서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이국적 풍경임에는 분명하다. 배의 출항시간이 아직 멀어서인지 아직까지 대합실은 한산한 편이다. 한 켠에서 열댓 명이 농성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노점상인 그들은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있다. 그러나 강한 구호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의 얼굴에는 지치고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곳곳에 한국의 목회자가 쓴 선교책자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중국을 주께로』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잡지도 눈에 뜨인다. 눈살이 찌푸려지기는 하지만 그 선교열정이 내심 놀라울 뿐이다.
대합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우리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보름 전 제천 예비모임에서 인사를 했던 터라 대부분 낯익은 얼굴들이다. 그 때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이름을 주고받고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오후 4시를 넘기면서 대합실은 온통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중국말들이 무수히 흘러넘치고 있다. 낯선 사성체계의 소음들이 ‘중국행’을 실감나게 한다. 다소 번잡한 출국수속을 마친 후 공항버스를 타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우리 일행을 중국 땅으로 옮겨줄 배는 웨이동페리. 매주 화, 목, 토요일 오후 6시에 출항하는 이 배는 지금껏 타본 어느 배보다 크다. 길이 186.5m, 폭 24.8m로 승무원이 69명, 승객도 656명이 탑승할 수 있는 규모다.
우리가 선상에서 하룻밤 머물 곳은 7층의 2인용 객실. 그리 넓지 않지만 오른쪽 벽에 붙어있는 섬과 바다 사진이 꽤나 인상적이다. 짐을 푼 우리는 선내 식당으로 향했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배여서 그런지 메뉴도 한국식이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배의 출렁거림이 느껴졌다. 시간은 출발 예정시간을 한참 넘겨 6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서둘러 갑판 위로 올라갔다. 선적을 끝낸 페리가 서서히 인천항을 밀어내고 있었다. 드디어 출발. 웨이하이(威海)까지 약 540km, 내일 아침이면 우리는 중국 땅을 밟게 된다. 항구를 바라보는 일행들의 얼굴에서도 가벼운 흥분과 긴장감이 스쳐간다. 10분이나 지났을까. 아스라이 멀어지는 인천항 위로 노을이 물든다. 반짝이는 생선비늘 같던 태양이 하늘에 진홍색 그물을 드리우고 있다. 투명하던 구름들도 붉은 빛을 머금은 채 긴 초서(草書)의 획처럼 허공을 가로 지른다.
일몰의 감동.
해가 진 후 우리 일행은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 서먹할 틈도 없이 주제는 참가 동기와 실크로드에 대한 기대 등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서울 종로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는 김제윤(40) 씨. 그는 자신의 삶을 뒤바꿨으면 하는 마음에서 길을 나섰다고 한다. 옛 사람들은 나이 사십이면 불혹(不惑)이라 하여 갈팡질팡할 일이 없다고 했건만 늘 번민과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실크로드가 자신의 생각과 삶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기를 그는 바라고 있었다. 괴산에서 온 스님은 이번 실크로드가 초행이 아니다. 지난해 다른 스님들과 실크로드 유적지를 돌아본 감동이 너무 커 이번에도 참가했다고 말한다. 스님은 실크로드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마른 나뭇가지 하나에도 구도의 숨결이 배어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일행 중 실크로드를 가장 많이 다녀온 사람은 역시 현광민 회장이다. 그는 실크로드를 수차례 다녀오면서 경험했던 일들을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문이 없고 지저분한 중국 화장실을 처음 봤을 때의 당혹스러움, 입맛에 맞지 않은 중국음식을 꾸역꾸역 먹어야 했던 기억, 비수기 때 천산 천지를 방문해 거친 소수민족들에 둘러싸여 죽음의 공포를 맛봐야 했던 일화 등.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오늘날 실크로드에서 만난 현장법사 얘기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에서 한 스님이 나무 지팡이를 짚고 터덜터덜 걷고 있더란다. 그 지점은 마지막 휴게소를 지나쳐 온지 200km가 넘었을 때였고 앞으로도 200km는 더 가야 마을이 있는 허허벌판. 이후 며칠 동안 현 회장의 머리 속에는 온통 그 스님 생각뿐이었다고. ‘그는 누구며,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왜 차를 굳이 마다하고 걷는 것일까.’ 그가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고난의 길을 구법으로 여기며 걷는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현장법사라는 것이었다. 밤은 깊어갔고 사람들의 이야기꽃은 갈수록 활짝 피어올랐다. 그 속에 타향에서의 첫날밤도 어느덧 함께 저물어가고 있었다.
언제 잠들었을까. 창밖으론 한 밤의 어둠에서 깨어난 새벽이 푸르스름하게 공기 속으로 풀려들고 있다. 갑판 위에 올랐다.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나아가는 거대한 선박 뒤로 오징어잡이 배들의 희뿌연 불빛이 아른거린다.
중국으로 향하는 뱃길. 그 옛날 원광, 의상, 혜초, 무상 스님 등 수많은 구법승들이 건넜던 길이기도 하다.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 가는 이는 많아도 돌아오는 이는 극히 드물었던 길. 갑작스런 폭풍으로 중국 땅을 밟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서 돌아오지 못한 혜업, 구본, 현각, 혜륜 스님 등 많은 구법승들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새 한마리가 선상 위를 이리 저리 맴돌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멀리 수평선 위로 육지가 보인다. 웨이하이다. 배는 미끄러지듯 항구로 빨려 들어간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 너머로 현대화된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인구 약 250만 명. 수많은 중국어 간판이 아니었더라면 동해안의 한 깔끔한 도시로 착각할 정도로 한국과 비슷하다. 입국절차를 마친 우리는 인근 숙소로 향했다. 우리가 여행할 차는 오후 늦게나 부두를 빠져나올 수 있다고 한다. 개인 소유차를 가지고 입국하는 일이 처음인 탓에 그 절차가 꽤나 까다롭다는 게 세관 관계자의 말이다.
우리는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반팔 내의만 걸친 군인들이 단체로 뛰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택시 앞좌석과 뒷좌석을 철창으로 막아 놓은 것으로 보아 이곳 운전기사들이 강도로부터 그리 안전하지는 못한 듯 하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기사의 운전대 앞에는 마오쩌둥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그는 중국의 경제가 발전한 것은 확실하지만 그 만큼 빈부격차는 커졌다며 ‘마오’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다시 나와야 한다고 푸념처럼 늘어놓는다. 마오쩌둥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애정은 각별했다. 이후에도 우리는 중국인들이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으며, 그와 관련된 책자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독재자라는 점에서는 동시대의 스탈린과 비슷했지만 죽은 이후 민중들의 반응은 현격히 달랐다. 이것은 비단 중국인들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는 자신의 딸을 ‘나의 작은 마오’라는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그에 대한 존경은 대단했다. 링 위의 난폭자 마이크 타이슨도 오른쪽 어깨에 마오쩌둥의 얼굴을 새겨 넣어 자신이 그를 숭배한다는 사실을 세계에 공표했다. 왜일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오랜 외세와 이민족에 의해 짓밟힌 민족적인 자존심을 되찾은 지사로,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공산정권을 수립한 탁월한 지도자로, 수많은 사람을 숙청했음에도 늘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서려고 노력한 영웅으로 평가하는 것과 관련될 듯 하다. 거꾸로 신장성(新疆省)이나 서장(西藏)지역의 소수민족들에게는 그가 침략자와 학살자일 수 있겠지만….
마오쩌둥 숭배자인 그 택시기사는 우리를 시내 중심가에 내려주었다. 높은 고층 빌딩과 거리의 많은 사람들. 서울이나 부산 등 우리나라 대도시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한글로 된 간판도 간간히 뜨인다. 이곳 백화점에서 깜짝 세일을 할 때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모습도 보였다.
숙소로 돌아올 무렵 서서히 어둠도 밀려오고 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길 위의 생활이다. 야외촬영 하던 신혼부부들이 떠나간 텅 빈 숙소 앞 해변가. 처얼썩거리는 파도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리고 있다.
⊙ 저자 이재형 소개
법보신문 에 근무하는 기자로서 2003년 제1회 실크로드 챌린지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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